사전투표날이다. 투표가 가능한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는데, 나는 5시 반에 사전투표소에 입장해서 거의 기다리지 않고 바로 투표를 진행했다. 조금 놀란 건 투표소. 저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랬는데, 제주시내권을 지나 동쪽에는 읍마다 1개씩, 총 2개가 전부라니!!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별로 놀라운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리'민으로는 별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난 쫌 신기하긴 했다. 그래도 그나마 '읍내'에 가까이 살고 있으니 다행이지, 당장 전부이니, 좀만 더 멀리 살았으면 절대 걸어서 갈 수 없었을지도...
뭐, 어쨌든 5시 반, 아니 투표소로 출발한 4시 반 전에는 열심히 선거공보물을 읽었다. 마음속으론 투표할 사람들이 언뜻 정했지만, 그거야 정당이나 이미지, 그리고 대형 이슈에 대한 반응을 통해 결정한 것이지 제대로 된 공약이나 지역현안들을 보고 결정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사소한 이야기'에서는 공보물들의 내용을 좀 정리해보는 것으로!
우리나라 선거에서 거대양당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 당선도 거대 여당에서 될 테고 말이다. 그러니 거대 양당의 이야기야 말로 가장 현실적인 변화 방향일 것이다. 특히 양당이 모두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일 것이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인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공보물은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지금 제주도에서 거대 양당이 동일하게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① 4·3 희생자 지원과 평화대공원 조성, ② 의료 인프라 확충과 상급종합병원 지정, ③ 일과 놀이가 결합된 워케이션 관광지로서의 인프라 확대 이 3가지이다.
4·3 희생자 지원이야 제주도의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이야기다. 또 알뜨르비행장부지에 평화대공원을 조성하는 건 그 세부내용들을 어떻게 채울지가 문제지, 그 자체로는 이미 예정된 사항이다. 게다가 제주도 내에는 중증 질환을 전문으로 하는 상급종합병원이 존재하지 않기에 의료권역이 서울이랑 묶일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는 대선에서도 지적된 문제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후보 모두 공약으로 걸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눈에 띄는 건 ③ 일과 놀이가 결합된 워케이션 관광지로서의 인프라 확대다. 사실 '워케이션'이라는 표현도 난 오늘 처음 들어봤다. 일work과 휴식vacation의 결합이라고 하는데, 빠른 인터넷을 기반으로 재택근무가 확대되면서 집이 아니라 휴양지에서 원격 근무하는 신종 근무형태다. 그만큼 즐겁게 일할 수 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건 알겠는데... 뭐랄까, 제주도 지역구에선 뭘 하겠다는 거지? 싶긴 하다. 나름 신종 관광산업을 부흥시켜보겠다는 건데, 뭔가 특별히 와닿지는 않는다. 제주도가 인터넷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냥 힐링을 대체하는 근사한 유행어 정도인 것 같기도 하고...
반면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대립되는 것 까진 아닌데, 한 당은 강조함에도 다른 당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우선 더불어민주당만 강조하는 것은 '환경보전분담금 제도'이다. 제주도의 1인당 쓰레기 배출량은 전국 평균의 60%가 넘는다. 그러나 제주도 폐기물 중 40%는 관광객이 만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관광산업이 주인 제주도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관광객으로 인한 환경문제를 직접 관광객에게 세금을 걷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환경보전분담금 제도이다. 그러나 관광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과 인두세적인 세금 부과방식이 아닌 좀 더 섬세한 부과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이와 달리 국민의힘만 강조하는 것은 제주 제2공항이다. 심지어 많은 공보물에서 '조속 착공'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현 제주공항은 포화상태이기에 관광산업발전과 항공안전을 위해 신규 공항이 필요하며,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북서쪽에 있는 제주공항과 반대로 남동쪽에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는 게 주 요지이다. 그러나 관광객 수를 늘리는 것이 맞냐는 근본적인 질문과 주변 주요 철새도래지들의 존재로 인한 버드 브레이킹의 위험과 습지 파괴로 인한 환경파괴 등의 이야기가 논쟁이 되고 있다. 사실 제2공항은 환경보전분담금 제도보다도 찬반 논쟁이 뜨거운 주제임에도 국민의힘은 굉장히 강렬하게 표현했는데,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판단 유보 전략인지 의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제2공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인상적이다.
거대 정당에 가려져 있지만 중소정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은 거대 양당이 움직이기 힘든 곳으로 파고들고, 강렬하게 특정 의제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번 제주도에서 비례대표를 낸 중소정당은 정의당, 녹색당, 기본소득당, 진보당 4곳이며, 도지사 후보를 낸 중소정당은 녹색당이 유일하다.
가장 눈에 띄는 정당은 단연 녹색당이다. 도지사 후보와 비례대표 후보를 모두 낸 유일한 중소정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광객을 줄이고 새로워질 일자리"라는 어젠다가 아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후보자들도 눈길을 끈다. 도지사후보는 유일한 40대의 유일한 여성후보이며, 비례대표도 23세와 18세의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는 형태가 이전엔 ‘똥돼지, 귤, 사투리’로 소비되었다면 지금은 ‘돌담과 살아가는 힙스터 제주인, 덜 노동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제주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신현정 비례대표 후보의 인터뷰도 인상깊다.
≪일다≫ 제주도에 오는 관광객 수를 줄여야 한다
4년 전,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은 제주에서 ‘녹색 정치’ 바람을 일으켰다. 원외 소수정당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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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거대양당이 워케이션이나 제2공항, 환경보전부담금제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고 호응하는 이야기로 '관광객을 줄이고 새로워질 일자리'를 어젠다로 내세웠겠지만, 그래도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정당치고는 너무 초라한 얘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주도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관광객이 간다면 그걸론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기존의 거대 양당과는 확실히 다른 차별점으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고, 그 내용도 지나치게 거대한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의제가 아닌 것 같다는 점에서 좋은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정의당과 진보당은 두 당 모두 제2공항 백지화와 농민수당 확대 지급,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라는 전통적인 진보정당의 이야기들을 선거공보물에 담았다. 그러나 그 아젠다들이 녹색당처럼 강렬하지 않았고, 도지사 후보도 내지 않아서 그런지 두 정당 모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정의당의 경우 지역화폐인 '탐나는전'을 강력하게 추진한 정당으로 지역화폐를 통한 지역상공인 지원을 얘기하고 있고, 진보당은 표준도선료 조례를 통한 택배 도선료 인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당은 제주형 기본소득과 보편복지를 찍어서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다른 세 정당에 비해서도 빈약하다는 느낌이다. 관광수익을 기본소득으로 배당하겠다는 점이 좀 인상깊긴 했지만, 제대로 표현되고 있지 않았고 애초에 공보물 자체가 잘 만들어진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이 외에도 도지사후보로는 무소속으로 나온 박찬식 후보도 있다. 박찬식후보는 전 제주제2공항 비상도민회의 상임공동대표로 제2공항 백지화를 아젠다로 끌고 나왔다. 기타 진보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나온 게 특이했는데, 무소속인 데다가 하나의 아젠다만으로 선거에 나왔음에도 5%가 넘는 여론조사 지지율을 가지고 있으니... 이 후보의 존재만으로도 제2공항문제가 얼마나 논란인지 잘 보여주는구나 싶다.
“도민들이 싫다는데…제주2공항 왜 강행하려 하나” [인터뷰]
[한겨레S] 인터뷰‘제주 가치 지킴이’ 박찬식 무소속 제주지사 예비후보노동운동, 4·3 진상규명 등 매진 뒤2공항 저지 나섰다 선거 출마까지“도민 반대 여론 절반을 넘는데도‘하지 말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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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과 교육의원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공보물에서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교육의원이야 제주도에만 남아있고 곧 없어질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치는데, 진보교육감과 보수교육감 두 명의 후보로 분명히 나뉜 교육감 후보들의 공보물이 꽤 유사한 건 신선했다.
두 교육감후보 모두 4.3평화 인권교육강화, 돌봄교실 확대, 특수학급 및 특수교육 보조교사의 채용, 통학편의 및 비용 감소를 위한 버스 지원, 교육행정직 및 비정규직의 근무 개선, 스마트기기 보급 확대, 그리고 신규학교 신설과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 등을 공약사항으로 꼽았다. 특히 위의 공통사항에는 그동안 진보교육감 후보들의 주요 공약사항이었던 것들이 보이는데, 그만큼 보수교육감 후보도 어느 정도 동의할 정도로 교육 흐름이 변해버린 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학생인권조례나 페미니즘 등 그만큼 선명한 진보교육감 후보들만의 공약사항을 이석문 후보가 들고 오지 않았다는 점도 사실이기도 하다.
대신 이번 진보교육감과 보수교육감을 나누는 기준은 고교체제 개편과 진단평가에 있다. 이석문후보는 고교학점제와 발맞춰 학교 간 교류를 강화해 일반계교-특성화고의 경계 없는 고등학교를 주요 공약으로 걸었고, 반면 김광수후보는 진단평가를 통한 학력진단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고교체제를 개편하는 걸 주요 공약으로 걸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지속된 진보교육감-보수교육감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학력격차 해소방안은? 김광수 “진단평가 실시” vs 이석문 “기초학력 보장” - 제주의소리
학력평가로 학생들을 줄세우기를 한다는 일제고사에 대한 논란이 불과 5~6년 전에 있었다. 코로나19 시대 우리 아이들은 지난 2년 동안 정상적인 학교수업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일각에선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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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독특한 점은 공보물의 비슷한 공약사항과 다르게 단체들의 지지 선언은 완전히 전통적인 진보-보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진보교육감 후보인 이석문후보는 제주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와 제주4.3유족모임, 직업계고 현장실습 피해자 가족모임으로부터 지지선언을 받았고, 보수교육감 후보인 김광수후보는 제주도 E스포츠 협회와 미래교육 희망 찾는 청년단체로부터 지지선언을 받았다. 이런 걸 보면 단순히 공보물로만은 확인할 수 없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가볍게 정리하려고 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이렇게 글을 남길 정도라면 아애 며칠 전에 미리미리 정리할 걸 싶기도 하다 ㅠㅠ 어쨌든 나는 열심히 공보물을 읽었고, 사전투표를 완료했다.
전혀 다른 얘기지만 최근 선거공보물과 관련해서 환경보호를 위해 온라인 배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책도 E-book으로 읽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나 같은 사람한테는 미리 지원받아서 디지털로 볼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공보물들을 분리수거하기 위해 스테이플러를 다 뜯다가 문뜩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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