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많으면 성공하나
차있으면 빨리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바보놈이 될순 없어 말달리자
"말달리자 - 크라잉넛" 중
여행일자 : 22. 7. 3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1. 편견, 인식, 어쨌든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1-1. '경마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불편함
나는 취미는 사진인 제주도민이다. 그래서 종종 말 사진을 찍는다. 사실 특별히 '말'을 찍으려고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동물이 말일뿐이다. 조금 의아할 수도 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선 고양이 다음으로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물이 말이다. 집에서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서우봉에는 항상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나름 말과 친근한 사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경마장은 다르다. 분명 제주도에서 경마장이 있고, 친한 친구도 승마를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처음 친구가 경마장을 가자고 얘기했을 땐 당황스러웠다. 경마장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말'이 아니라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국 경마장을 가보기로 결정했을 때조차 우리에겐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경마장이라는 곳, 경마장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사이의 일, 그리고 경마를 통해서 벌거나 잃을 돈이 궁금해 가기로 결정했다. 경마장에 가기 며칠 전까지 경마경기나 말에 대한 생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대체 경마장엔 왜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연히 '경주하고 있는 말 사진을 한 번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린 게 유일했다.
1-2. 누군가의 일상 공간
서울역에서 4호선을 타고 경마공원역으로 가는 도중, 마사회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 우리에게 경마장 이야기를 처음 꺼낸 녀석이 "뭔가 경마장에 갈 것 같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릴 거다"라고 말을 툭 내뱉었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경마공원역에 도착했을 때 잿빛 혹은 약간 물탄 파란빛의 옷을 입은 4-60대의 아저씨들이 아무 표정도 의욕도 없이 한꺼번에 터덜터덜 지하철에서 쏟아져내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외로 렛츠런 파크의 입구는 길었는데, 그래서인지 모두가 비슷한 속도로 같은 방향을 걸었기에 더욱 인상이 깊게 남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나이와 스타일만 다를 뿐, 월요일 출근버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반쯤 퀭한 표정으로 비틀대며 걸어가는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광경은 경마장에 대한 내 기존의 생각을 송두리째로 흔드는 장면이었다. 지금껏 나는 경마장이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스포츠 경기장이나 관광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쨍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채 카메라를 들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마주한 경마장은 지독할 정도로 평범하고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특별한 복장이 필요하지 않았고, 서로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았으며, 기대감에 가득 찬 미소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눈초리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깨닫는 순간 나는 급속도로 소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렛츠런 파크의 모든 모습을 카메라로 담겠다는 목표는 덮어두고 그저 쭈뼛쭈뼛 대며 친구를 따라 걷기에만 집중했다.
1-3. 나와 다른 이들이 즐기는 문화
경마장을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일상 공간으로 마주하자 새로운 의문들이 들었다. 어쨌든 이곳은 직장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라 취미생활로 '선택'한 곳이다. 그렇다면 취향의 문제다. 누군가는 클럽을 미치도록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발을 들이려 하지조차 않는다. 나는 시간이 남으면 카페에 가는 걸 선호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PC방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떤 이유로 '선택'된 것일까? 그리고 나는 경마장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난 컴퓨터를 좋아한다. 게임을 꽤 즐기는 편이고, 당장 퇴근하고 나서도 사진을 편집하거나 큰 화면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기 위해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아있다. 어두컴컴한 곳과 RGB의 화려한 조명도 좋아한다. 그러나 난 PC방에 거의 가지 않는다. 소란스럽게 온라인게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PC방에서도 충분히 사진을 편집하고 블로그의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거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그러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광적인 사람들 틈에서 같이 열광하지 못하고,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같이 소란 피우지 못하면, 그건 상당히 어색한 일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내가 즐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PC방을 다니는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얕잡아보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동경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다른 이들이 즐기는 문화, 내게 PC방은 딱 그 정도다.
그러나 경마장은 다르다. 나는 경마장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미 원인 모를 공포와 혐오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일단 핑계는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도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경마장은 불법 도박이 아니다. 그리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 주변에 모든 '도박'들을 다 이렇게 여기지 않는다. 어르신들끼리 모여서 소소하게 즐기는 내기 고스톱도, 젊은이들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모바일 가챠게임들도, 개인적으로 왜 하는지 이해 가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경멸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도 팬미팅에 가기 위한 앨범깡이나, 랜덤박스, 심지어 리셀문화 등 확실히 도박이라고 부를 순 없으나 어느 면에선 상당히 닮아있는 문화들을 마주할 때, 기껏해야 느끼는 나쁜 감정은 한심함이지, 공포감과 혐오감으로 대표되는 불쾌함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마장에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도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아마 나와 너무나도 다른 공간에 있는, 정말 접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사람들은 '잿빛 혹은 약간 물탄 파란빛의 옷을 입은 4-60대의 아저씨'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도 아니고,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을 쉽게 얕보면서, 그들로부터 정체모를 공포심을 갖는다. 당연히 이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사실 생각보다 경마장에는 '잿빛 혹은 약간 물탄 파란빛의 옷을 입은 4-60대의 아저씨'가 아닌 사람들도 많다. 그렇기에 경마라는 이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이 비합리적인 편견을 내려놓는 일이다.
다만 이건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편견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렛츠런 파크에는 그들을 경계하는 <2040ZONE>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40ZONE>은 조금 더 따뜻한 색감에, 조금 더 불편하지만 젊은이들의 취향에 가깝게 꾸며져 있다. 아마 렛츠런 파크에서는 이 공간을 통해 '쨍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나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 경마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식의 분리는 오히려 '잿빛 혹은 약간 물탄 파란빛의 옷을 입은 4-60대의 아저씨'들과 '쨍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사람들 간에 거리감만 더 확대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민이 들었지만, 더 한 고민은 렛츠런 파크에게 넘기기로 했다.
2. 스타디움 혹은 카지노
2-1. 어딘가 조금 익숙하지만, 또 조금 어색한
렛츠런 파크로 들어가는 길에 인상 깊은 건 잡지 판매소다. '확률경마', '에이스경마', '고배당 뉴월드'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잡지들은 경마를 즐기기 위해선 꼭 필요한 준비물이다. 처음에는 활자 중독자로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읽을거리'가 있는 책이 아니었다. 그저 오늘 몇 번 경기에 어떤 말이 나오고, 몇 번 말이 승리할 것이라 예측하는 일종의 찌라시였다. 물론 경마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에겐 무척이나 필요한 책임은 사실이다. 아니, 다들 이 책을 사고 경마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경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참고서'임이 틀림없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읽을거리 없는 잡지를 하나 사 들고 경마장 안으로 들어갔다.
잡지를 사들고 경마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또다시 펼쳐진 예상치 못한 광경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한 경마장이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나는 스타디움을 생각하고 있었다. 경기장을 향해 사람들이 앉아있고, 소리 지르며 음식을 팔고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본 경마장은 왜인지 공항과 더 닮아있었다. 실내는 깨끗했고, 편의점과 음식점, 카페가 곳곳에 있었다. 의자는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잡지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비행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뭔지 모를 숫자들로 가득 차 있는 스크린을 흘끔흘끔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더 당황스러운 건 경기가 시작되고도 이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여느 스타디움처럼 야외에도 좌석과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다. 하지만 첫 경기가 이루어지는 곳은 렛츠런 파크 '서울'이 아니라 '제주'였다. 그러니까 야외로 나가봤자 경기하는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다들 무더운 여름 굳이 에어컨도 없는 야외에서 스크린을 보느니, 실내에서 시원하게 스크린을 보는 걸 택한 것이다. 이렇듯 경마경기는 단순히 서울과 제주에서 반복해서 열릴 뿐 아니라, 제주 경기도 서울에서 배팅하고 즐길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이는 반대로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지역 곳곳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에서도 서울과 제주에서 하는 경기를 여기와 똑같이 배팅하고 있을 것이었다.
뭔가 미묘하게 스포경기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야외로 나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땅히 앉을자리를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난생처음 경험하는 경마경기인데,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2-2. 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밖으로 나간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연승이니, 쌍승이니 하는 말들을 대충 파악했다. 그리고 나는 8번 말 '최고권력'이 3등 안에 들 것이라는 데에 1,000원을 걸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름이 웃겨 응원할 맛이 날 것 같아서 걸었다. 결과적으로는 배당률이 엄청 높은, 그러니까 3등 안에 들지 못할 것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도 1,000원을 잃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 또 한 번 나는 경마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경기시간은 10분은커녕 고작 1분. 내가 '최고권력'을 응원할 수 있는 건 정말 놀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경기 전 후 그 언제도 '최고권력'이 어떤 말인지, '최고권력'을 타고 있는 기수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후에 알고 보니 '최고권력'은 이제야 3살이 되어, 경주마로는 최저등급인 6등급을 겨우 받아 승률 0%에 획득 상금 0원인 신참이었다. 그러니 만약 이게 경마가 아니라 다른 스포츠였다면 '혈기왕성한 신입이 1등을 노린다!'와 같은 손발 오그라드는 맨트와 함께 서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런 서사들이 선수에 대해 감정이입을 만들고, 선수를 응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경마장에는 그런 게 없었다. 스크린에는 지금까지 몇 번 말의 배당률이 얼마나 되는지만 알려주고 있었다. 초보자들을 위한 안내문도 경마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떤 말이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연승', '삼복승'의 의미와 돈을 거는 방법이었다. 뭐랄까?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정보들이 스포츠 경기를 위해 구성된 게 아니라, 돈을 걸고 따기 위해 구성된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어떤 선수가 얼마나 멋진 경기를 할 것인지가 존재하지 않으니 극단적으로 이게 실제 말들이 달리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온라인 확률게임이라도 무언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렇기에 이름만 보고 응원할 선수를 뽑았던 내 판단은, 한국인이 있다는 이유로 외국리그의 팀을 응원하고, 잘생긴 선수가 있다는 이유로 프로팀을 지지하는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에선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경마에서는 완전히 이상한 일이었다. 경마장에 있는 건 '최고권력'이 아니라 '8번마'였고, 그것도 '승률이 낮아 배당금이 20배가 넘어가는 8번마'였기 때문이다.
3. 돌고 돌아 경마장이 싫은 이유
편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넓은 소파, 맛있는 앤티앤스프레즐과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 흔하지 않은 스포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 넓은 산책코스와 탁 트인 정경, 심지어 박물관과 전시물까지... 하나하나씩 따지고 보면 경마장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공간이다. 더군다나 <2040ZONE>에 들어가면 복잡한 편견과 인식들을 일단 치워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커피를 주는 식물원은 식물원이고, 화분을 기르는 카페는 카페인 것처럼, 친구들과 소란스럽게 온라인 게임을 해야 PC방이고, 마표 하나에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경마장이다. 그리고 잠깐 경마장을 체험해본 결과, 난 경마라는 게임 그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난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승리에 눈이 멀어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사람이나, 우리 팀이든 상대팀이든 일단 욕부터 하고 달려드는 목소리들이 질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올림픽을 응원할 땐 신이 났고, 친구들과 놀러 간 야구장은 재미있었다. 선수와 같이 호흡하는 관객들, 화려하고 멋진 스타플레이어, 긴 기다림 끝에 터져 나오는 결정적인 플레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경험한 경마장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대신 29분간 돈을 걸기 위한 눈치싸움과, 단 1분 동안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격렬하게 분노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가볍게 오락처럼 즐긴다. 마치 모바일 가챠게임에서 수백만 원을 탕진하며 '사회적으로' 한심하게 비춰지는 사람이 있음에도, 큰 무리 없이 소소하고 즐겁게 즐기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마를 오락으로 즐기기엔 세상엔 너무 즐거운 것이 많고, 내 마음속에서 떨쳐내야 할 편견 또한 많다. 그러니 앞으로 굳이 경마를 즐길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나와 다른 이들이 즐기는 문화, 내게 경마장은 이제 딱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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