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오름

[오름]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 탐방기

웨이들 2022. 8. 16.

태평양전쟁이 끝나 갈 무렵, 
일본은 패전이 짙어지자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특수 병기를 개발하여 배치하였다. 
특수병기는 비행기, 어뢰정, 선박 등에 폭탄을 싣고 
연합군을 직접 공격하는 자살공격용 무기를 의미한다. 

결전을 위해 제주도내에도 서우봉, 수월봉, 송악산, 삼매봉, 일출봉 5곳에
특수병기가 설치된 특공기지가 건설되었다.

서우봉 일제동굴진지는 그중의 한곳으로
해안절벽을 따라 동굴진지 18곳, 벙커 2곳이 구축되어 있다.
동굴진지 총 길이는 약 340m에 이르며
5부 능선에 위치한 왕자형 동굴진지는 약 100m로 가장 규모가 크다.
자살공격을 위한 특공기지의 구축형식뿐만 아니라
제주의 방어전략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제주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 안내" 중


 

여행일자 : 22. 8. 14
정보 전달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1. 두 개의 정상이 있는 서우봉

 

함덕에서 산 지 반년, 내가 함덕에서 가장 많이 찾아간 곳은 서우봉이다. 벌써 족히 30번은 오르내린 것 같은데, 사진찍겠다고 오르고, 운동하겠다고 오르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구경시켜준다고 올랐다. 서우봉은 그만큼 매력적인 오름이다. 그것도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예쁜 오름이 아니라, 코스마다 계절마다 그리고 날씨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가진 다채로운 오름이다. 

 

서우봉은 두 개의 정상이 있는 독특한 오름이다. 북쪽의 망오름정상과 남쪽의 서모정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봉우리는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생성 시기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기에, 각 각을 별도의 오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오름 '서우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서우봉은 다른 흔한 오름과 다르게 코스가 아주 다양하다. 서우봉 바깥을 도는 둘레길, 서모정상을 중심으로 한 제1숲길, 망오름정상을 중심으로 한 제2숲길과 제3숲길, 각 각의 정상을 오르는 길들이 각각 따로 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오늘의 여행코스, 중요한 건 맨 상단의 진지동굴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코스를 갈 예정이다.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가진 못했던 일제진지동굴 코스다. 정확히 말하지만 '---'으로 표시되어 있는, 아직 제대로 개통되지 않은 진지동굴길 코스다. 아직 미개통이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숲길이거나 출입금지구역은 아니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주말 겸 광복절시즌을 맞이해서, 카메라를 들고 서우봉의 숨겨진 코스인 진지동굴길 코스로 출발했다. 

 


 

2. 진지동굴로 가는 길

 

2-1. 북촌리 서우봉을 향하여

 

서우봉은 함덕리 서우봉으로 알려져있지만, 정확히는 함덕리와 북촌리에 걸쳐져 있는 오름이다. 심지어 북촌에 속한 면적이 전체의 3/4를 차지한다고 한다. 다만 함덕쪽 입구에는 바로 옆에 함덕해수욕장과 캠핑장이 붙어있고 주변에 편의점이나 카페들도 줄지어 있을뿐더러 주차장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덕에서 출발해서 함덕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함덕 주민이라서 함덕에서 출발해서 함덕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훨씬 익숙하다.

 

그러나 진지동굴길을 가기 위해서는 함덕보다는 북촌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다. 애초에 진지동굴이 북촌입구에 가깝기도 하고, 길 자체가 편하지 않아서 함덕에서 시작해 오름을 오르고 내려와서 다시 길을 헤쳐가며 진지동굴을 찾아가는 건 꽤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서우봉으로 가는 길

 

그래서 나는 201번 버스를 타고 <북촌리해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함덕과 북촌의 경계를 지나고 처음 나오는 버스정류장인데, 위 지도에 가장 오른쪽 아래에 있는 지점이다. 북촌리해동 버스정류장에는 201번과 마을버스인 704-4번만이 서는 정류장인데, 704-4번 버스로 갈아타면 서우봉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하지만 마을버스 배차간격이 워낙 길기도 하고, 심지어 거리도 가깝고 가는 길도 고즈넉해서 나는 걸어가는 걸 선택했다. 

 


 

2-2. 아주 조용한 해동포구

 

해동포구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금방 해동포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704-4번 다니는 아주 자그마한 버스정류장인데, 의외로 정비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 704-4번버스 노선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들어온 곳으로 바로 나가는, 그러니까 맞은편 정류장이 없는 아주 독특한 정류장이다. 따지고 보면 서우봉 때문에 큰 길이 마을로 나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둘러가는데, 그러다 보니 <북촌리해동> 정류장은 큰길에 있지만 마을과 멀고, <해동포구> 정류장은 마을과는 가깝지만 어설픈 길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되었든 이름이 '해동포구'인 것처럼 이곳에 도착하면 가장 눈에 띄는 건 넓은 바다다. 포구라곤 하지만 주변에 북촌포구나 조천항이랑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로 조그마한 포구인데, 그래서인지 시선을 뺏는 배가 별로 없어서 바다가 더 넓어 보인다. 

 

아주 작은 포구와 아주 작은 다리

 

그런데 작은 건 포구뿐만 아니다. 북촌리 해동 자체가 굉장히 작은 마을이다. 그러니 <북촌리해동>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카페도 없고, 편의점도 없다. 특히 편의점을 찾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더 이동해야 하니 마실 물이나 간식은 함덕에서 미리미리 가져와야 한다. 보통 서우봉이라고 하면 관광지 근처에 있는 왁자지껄한 오름을 떠올리곤 하는데, 오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완전히 다른 것도 개인적으로는 꽤 재미있는 포인트다.

 


 

2-3. 서우봉 위로 올라가기

 

해동포구에서 서우봉으로 향하는 길을 잡으면 바로 초록색 안내판을 만난다. 이 안내판은 <제주조천 북촌마을 4·3길> 안내판으로 일제진지동굴이 서우봉의 천연동굴들과 함께 제주4·3 대학살 당시 주민들이 숨어 들어간 동굴이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다. 애초에 일제 진지동굴길이라는 게 마냥 명랑한 여행코스는 아니긴 했는데, 이 안내판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번 코스의 의미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뭔가 경건하기도 하고 왠지 씁쓸해지기도 한 상태로 나는 서우봉을 올랐다. 참고로 <제주조천 북촌마을 4·3길>에 관해서는 제주4·3평화재단의 4·3길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제주4·3| 4·3 길| 4·3길과 올레| 4·3길 소개|

4·3길 소개 4·3당시 제주도민이 겪은 통한의 역사현장을 국민이 공감 할 수 있는 역사·교육현장으로 조성,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의 4·3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

jeju43peace.or.kr

 

<제주조천 북촌마을 4·3길> 안내판

 

안내판을 따라 서우봉으로 올라갈 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꼭 뒤를 돌아봐야 한다는 점이다. 올라가는 길이야 산 쪽 방향이라서 크게 경탄할 일은 없는데, 그럴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작은 해동마을이 바닷길과 함께 내려다보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높은 건물도 없고 시끄러운 가게들도 없는 조용한 바닷마을길에, 멀리 보이는 거대한 풍차와 그 뒤로 깔려있는 구름들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반짝이는 바다와 해동포구의 다리, 그리고 제주도의 경관

 


 

3. 제주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

 

3-1. 동굴진지로 들어가는 길

 

해동포구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동굴진지로 가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워낙 이정표가 작기도 하고 '여기가 길이 맞나?' 싶은 곳이기도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가다 보면 쉽게 놓칠 것 같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가 맞겠지 하는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정표와 동굴진지로 가는 길

 

그러나 생각보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금방금방 이정표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사람이 많이 다니지는 않는지 풀이 높게 자라거나 나무가 아래까지 내려간 경우들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나는 긴바지를 입고 짐이 많지 않았기에 그렇게 큰 무리는 없었다. 대신 산길을 따라 난 동굴을 찾아가는 거라 당연하게도 길이 조금 울퉁불퉁하고 경사가 깊은 편이어서 긴장한 상태에서 조심조심히 걸어야 했다. 

 

해안에 있는 동굴진지 #4

 

가장 먼저 만나는 이정표는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해안으로 나가면 동굴진지#4를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굴진지#1-1을 갈 수 있다는 이정표였는데, 일단 나는 해안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3-2.  결7호 작전과 20개의 동굴진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치닫아가는 1945 3, 일본 최남단인 이오지마가 함락되고, 3 10일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무차별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본토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한 미군의 전격 가능 루트를 총 7로 설정하고 결1호, 결2호... 결7호의 작전명을 부여했다. 이 중 결1호~결6호는 연합군의 상륙이 유력한 본토였다. 그리고 마지막 결7호는 규슈와 중국 남부, 필리핀과 한반도의 중간에 자리잡은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완전한 전투요새로 전환되었다. 1945년 4월에 3,000여 명의 병력만 배치되었던 제주도는 3개 육군사단, 1개 혼성여단 7만5000여명의 병력이 배속됐다.

 

늘어난 건 병력만이 아니었다. 제주도는 전 지역에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한 온갖 군사시설들이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등재한 도내 일본군 전쟁 유적지는 모두 13곳으로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사라봉 동굴진지, 어승생악 동굴진지,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서우봉 동굴진지, 셋알오름 동굴진지, 일출봉 해안 동굴진지,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모슬봉 일제 군사시설,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셋알오름 고사포진지,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이다.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있는 동굴진지들

 

그중 서우봉의 동굴진지는 일본 해군 자살 특공기지이자 연합군 함대를 향해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된 진지였다. 동굴진지는 갱도 18곳과 벙커 시설 2곳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동굴진지#4~#20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밖으로 나온 내가 마주한 건 그야말로 해안선이었다. 그러니까 길을 따라 걷는 게 아니라 그냥 해안선 돌을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진지동굴길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처음 마주한 동굴진지#4는 을씨년스럽다고까지 느껴졌다. 아무래도 깎아내려가는 절벽 위에 있었고, 붕괴 위험 지역 안내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어서 더더욱 그런 것 같았다. 

 

진지는 막혀있고 붕괴 위험 지역이라 적혀있는 동굴진지#4

 

동굴진지#4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순서대로 5~20의 동굴진지를 만날 터였다. 그러나 길 자체가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만약 물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산 위로 들어갔다. 나중에 다 정비되어 길이 나면 그때 가보는 걸로 하고, 일단 오늘은 동굴진지#1~4를 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3-3.  ‘王’자형 진지와 섬뜩한 역사

 

안쪽으로 들어와 동굴진지#1-1부터 #3까지 가는 길은 해안길보단 훨씬 편했다. 나무들도 워낙 우거져 있어서 내리쬐는 햇빛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것 또한 좋았다. 게다가 이정표들도 곳곳에 있었고, 안내판들도 잘 부착되어 있으며, 사진을 찍으라고 둔 건지 정체를 모를 발판도 있어서 더 좋았다. 다만 동굴진지#4와 마찬가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동굴진지는 없었고, 안내판에 적힌 설명 문구가 전부 똑같은 점은 아쉬운 점이었다. 

 

진지동굴#1-2에서 사진을 찍은 웨이들

 

모든 진지동굴 앞에 똑같이 적혀있는 안내판에는"‘王’자형과 비슷한 동굴 진지는 제주도 내 다른 일본 해군 특공 진지에 비해 훨씬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라는 표현이 적혀있다. 이건 동굴진지#1을 일컫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동굴진지#1의 출입구는 1-1과 1-2, 1-3로 3개나 있었다. 내부 모습은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볼 수 있는데,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주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 (濟州 犀牛峰 日帝 洞窟陣地) : 국가문화유산포털 -

 

www.heritage.go.kr

빨간색이 내륙 길로 접해 있는 왼쪽의 3개가 #1-1~3이고, 중앙에서 살짝 우측에 2개가 순서대로 #2, #3

 

실제로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는 꽤나 거대한 동굴진지다. 무려 일곽 850㎡이니 말이다. 그저 대충 몸만 숨기기 위한 진지 가 아니라, 자살보트 ‘신요'와 인간 어뢰 ‘카이텐’을 숨겨 놓고 미군을 공격하려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나니 그 넓은 크기가 더욱 섬뜩해졌다. 다만 1945년 8월,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기 이전 일본이 항복하면서 실제 자살 특공대가 배치되지는 않았고 군사시설들도 완공되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버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더 섬뜩한 것은 이 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 특공대들이 배치될 진지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노역했을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슬프고 아픈 역사다.

 


 

4. 다시 떠들썩한 함덕으로

 

닮은 듯 다른 동굴진지#3

 

산 쪽에 있는 동굴진지의 마지막인 동굴진지#3까지 도착하고 나서 나는 그대로 길 따라 다시 거슬러 와야 했다. 서우봉지도에 따르면 동굴진지#3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이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길이 다 정비되지는 못한 듯했다. 그래서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온 뒤, 기왕 서우봉에 왔으니 집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함덕으로 향했다. 

 

복잡한 서우봉의 이정표

 

진지동굴길을 빠져나오자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평상시에 걷던 산책길이기도 하고, 함덕 쪽으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즐거운 표정의 관광객들을 한 명 한 명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서우봉을 넘어 함덕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저 멀리 함덕해수욕장에서 제트보트를 신나게 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였다.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 서우봉은 자살보트 ‘신요'를 숨겨 놓기 위한 동굴진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그야말로 끔찍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우봉은 제트보트와 그 보트를 신나게 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슬픈 역사를 덮어 씌운 건 행복한 사람들의 익사이팅한 레저였다. 이건 꽤 아름다운 예술이 아닐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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