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공연

[공연] 해무 / 극단 가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대회)

웨이들 2022. 4. 19.
바다에서 만난 짙은 안개를 해무라고 한다.
바다에서 바람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안개이다.
파도에는 길이 있고 바람에도 길이 있으나 안개에는 길이 없다.
짙은 해무는 어부들의 조각난 마음은 물론 바다와 하늘의 경계조차 허문다.
남은 것은 한없는 무기력과 끝을 알 수 없는 정체와 고립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공포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것,
그것이 해무가 주는 공포이다.
어둠 속에선 불을 밝히면 되지만 빛 속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김민정 작가의 <해무>" 중


 

정보 전달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대회

 

1) 제주도에서 연극보기

 

이 행사를 알게 된 건 버스정류장에 붙은 팜플렛 덕분이었다. 제주도에선 팜플렛이나 현수막이 정보공유의 큰 역할을 한다. 수도권에 산다면 온라인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겠지만, 왠지 제주도에서는 행사정보를 알기 어렵다. 게다가 인터넷에 눈에 띄는 제주도 행사들은 주민보다는 관광객들을 위한 행사인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수도권과 인구수가 차이가 워낙 많이 나기 때문인걸까?

 

어쨌든 버스정류장에 붙은 팜플렛을 친구가 사진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연극을 본 적 없다는 그 친구의 말에 '한 번 같이 가볼까?' 싶으면서도, 왠지 제주도에서 열린다는 것 때문에 덜컥 겁을 먹었다. 왠지 상업성은 생각하지 않는 아주 어렵고 난해한 현대예술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코로나 이후 건조해져 버린 문화생활에 목말라있었기에 연극을 보러 가기로 결정했지만,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후기나 별점이 쏟아지는 서울 대학로의 연극과는 다르게, 뭔가 명쾌하게 어떤 작품인지 모르고 가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다행인 것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문예회관, 관람료는 무료.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조금은 두려워하면서도 주말 공연 <해무>를 보러 갔다. 

 

확실히 제주도에선 팜플랫과 같은 고전적인 홍보물이 중요하다

 

2) 대한민국연극제란?

 

대한민국연극제란 한국연극협회에서 주최하는 전국 '순회' 연극'경연' 축제이다. 매년 서울을 포함한 16개 시‧도를 순회하여 개최하는데, 올해는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in 밀양>이라는 이름으로 7월 8일부터 30일까지 밀양공연예술축제와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시상이 뒤따르는 '경연'이기 때문에, 본선에 올라갈 프로그램을 뽑기 위해 각 지역에서 예선대회를 진행한다. 

 

 

대한민국연극제

단 하나, 국내 최대 규모 연극제

ktf365.org

아직 홈페이지는 본선 진출작들이 결정되지 않아서 그런지 조금 휑하다.

 

우리가 보기로 한 <해무>도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in 밀양>에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극단 가람의 작품이다. 올해는 극단 파노가리의 <수레바퀴>, 극단 세이레의 <숙영낭자전을 읽다>, 극단 가람의 <해무>, 그리고 예술공간 오이의 <누가 온누리를 죽였나>라는 작품이 예선작으로 출품되었다.

 

제주도 문예회관에 달려있는 플랜카드

 


 

2. 해무 : 바다에서 만난 짙은 안개

 

1) 전진호와 미쳐가는 사람들

 

연극 <해무>는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폭주하는 인간상을 그린 작품이다. 거듭된 조업의 실패로 전진호의 다섯 선원들과 선장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고기잡이는 거듭 실패하고, 선장은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들의 밀입국을 돕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뜻밖의 해경 훈련으로 파도가 심한 곳으로 급히 도망갔던 날, 조선족들을 숨겨두었던 선실에 환풍기를 막아놓는 사고로 인해 선원 동식과 사랑에 빠져 다른 곳에 있었던 조선족 홍매를 제외하고 모든 조선족이 질식하여 사망하고야 만다. 

 

이미 밀입국이라는 범죄에 가담했기에 해경에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 그리하여 전진호의 선원들은 시신들을 바다에 유기하기로 한다. 그러나 단순히 바다에 던져진 시신들은 다시 떠오를 따름이고, 결국 가장 나이가 많은 선원 완호가 시체의 몸에 피를 내어 바다로 던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어지는 긴 안개, 해무.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와 짙은 안갯속에서 전진호의 선원들은 죄책감과 생존욕, 자신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불안감과 아집, 짧은 시간 동안 갖게 된 애정과 의심으로 미쳐가는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  

 

집 앞 함덕해수욕장에서 찍은 해무 사진

 

2) 불신으로부터 시작된 비극

 

연극은 뻔히 보이는 결말에서 더 안 좋은 상황만을 선택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리스 비극 같은 느낌이다. 등장인물들의 인간적 한계로 인해 상황이 극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바다 위 배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경험한 비극적 사고로 인해 현명한 대처를 하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선장과 폭력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하는 호영, 끊임없이 불만만 내뱉을 뿐인 경구 등 어쩌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을 차례차례 망가뜨려 결국 처절한 패배로 나아간다. 

 

본격적인 비극의 시작은 밀입국을 선장이 결심한 순간도, 사고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질식사한 순간도 아닌, 서로를 적대하고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한 배를 탔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선원들 간은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계다. 그러나 전진호는 출항하는 순간부터 이미 거친 뱃사람들의 소통방식을 넘어섰고, 하나하나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안 좋아질수록 관계는 파탄 나기 시작한다. 호영과 경구의 싸움은 날로 심해지고, 동식은 살아남은 홍매에 관해 선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며, 창욱은 동식과 사랑에 빠진 홍매를 성적으로 취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선장은 위압하고 명령하며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킨다.

 

결국 고기잡이에 실패한 순간도, 불법 밀입국을 결정한 순간도, 사고로 인해 패닉에 빠진 순간도 서로 제대로 감정을 해소하거나 서로에게 의존하지 못하고 고립된다. 심지어 다른 선원들을 위해 시체에 직접 상처를 냈던 완호조차 동료들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스스로 바다에 떨어지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과 생존욕에 충실하지 않았던 완호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에서 조차 남은 선원들은 애도가 아닌 상대에 대한 공격을 선택한다. 

 

3) 나에겐 너무 버거운 작품

 

연극 <해무>는 사실 이미 유명한 작품이다. 2007년 '제7태창호 사건'을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같은 해 이미 초연되기 시작했고, 2014년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나왔다. 그만큼 인정받은 작품이라는 뜻 이리라. 실제로 극단 가람의 공연은 놀랄 정도로 흡입력 있었고, 연극이 다 끝나고 나서도 배우들의 목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그 열연에 감탄했다. 

 

2014년 영화 해무 포스터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다. 뱃사람에 대해 익숙하지 않고, 그들의 마초적인 문화에 움찔움찔거렸던 것도 원인이겠지만, 일단 끊임없이 화내고 쏟아내는 말들을 다 받아줄 정도로 내 마음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망가져가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해무>를 다 보고 문예회관을 나서는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렇다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내겐 비극적인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과, 화요일의 <누가 온누리를 죽였나>도 보러 오자는 약속이 남았다. 오! 이 블로그 글도 남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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