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빼고 다 사랑에 빠져 봄노래를 부르고
꽃잎이 피어나 눈 앞에 살랑거려도
난 다른 얘기가 듣고 싶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버릴
오오 봄 사랑 벚꽃 말고
"봄 사랑 벚꽃 말고 - HIGH4, 아이유" 중
정보 전달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1. 서론 : 제주의 시간, 그리고 봄
서울은 달력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의미 있는 날'들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날'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특별한 일이 없다 싶으면 자신들만의 '~~날'을 만들어낸다. 가수들은 신곡을 내고, 프랜차이즈들은 신메뉴를 쏟아내며, 기업들은 기념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서울의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 며칠인지이다. 그러나 제주는 다르다. 일단 기념일을 만들어내는 기업이나 신제품을 만들 프렌차이즈가 별로 없고, 서울의 광화문과 대학로처럼 각종 행사가 집약되는 공간도 없다. 그러다 보니 '~~날' 행사는 소규모로 진행되거나 오프라인에서는 진행되지 않는데, 이에 자연스럽게 오늘이 며칠인지는 서울보다 덜 중요한 질문이 된다.
대신 제주의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와 계절이다. 올해 1~2월만해도 70만명의 제주도민이 사는 제주도에 220만 명의 관광객이 입도했다. 이 수많은 관광객들은 단순한 제주의 방문객이 아니다. 이미 많은 카페나 음식점들이 이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고, 유행을 선도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광객들은 거대한 빌딩이 아니라 한라산과 오름을 보고자 하며, 건물 안을 찾아들어가는 게 아니라 건물 밖을 쏘다니고 싶어 한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오늘이 며칠이야?'나 '오늘 무슨 날이야?'보다 '오늘 날씨는 어때?'와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어?'라는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 그게 관광객이든, 카페 사장이든, 평범한 제주도민이든 말이다.
제주에 살면서 농담 삼아 얘기하는 게 있다. '동백꽃-매화-유채꽃-벚꽃-청보리-수국-해바라기-메밀꽃-코스코스-핑크뮬리-억새-눈꽃'. 제주에선 1년 내내 꽃만 보러 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이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관광지와, 서울과는 다르게 꽃에 파묻히고 싶은 관광객이 함께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득바득 넘어가지 않을 거라 우길 이유가 하나 없으니 나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피할 수 없는 게 벚꽃이다.
우리 세대에게 벚꽃은 봄의 상징이자 꽃놀이의 상징이다. 그래서인지 매화 보러 간다거나 메밀꽃 보러 간다고 할 때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도 벚꽃 보러 간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애초에 3월 말부터 어딜가나 벚꽃보러 간다는 이야기가 쏟아지니, 그 틈바구니에서 꽃놀이를 가지 않으면 오히려 안쓰러운 눈길을 받을 정도다. 마침 너무나 맑은 주말을 맞이했기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벚꽃을 보러 뛰쳐나갔다.
2. 여행지
2-1. 전농로, 카메라를 들고 모인 사랑스러운 산책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전농로다. 워낙 왕벚꽃축제로 유명하기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로 인해 왕벚꽃축제가 취소되어 조금은 한산한 벚꽃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은 많았는데, 애초에 '왕벚꽃거리'라 그런지 작정하고 옷을 갖춰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생샷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전농로에는 오래되고 커다란 왕벚나무들이 많다. 몇몇 왕벚나무는 도로를 만들기 전부터 있었는지 차도 위에서 차들의 흐름을 당당하게 방해할 정도다. 시청과 중앙로 등 시내와 구도심에 가깝기에 뭔가 익숙한 건물들과 풍경 안에 줄지어 핀 벚꽃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게 전농로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한다. 아마 왕벚꽃축제가 열렸다면 노점들이나 소품샵들이 줄지어져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을 텐데, 그 즐거움은 코로나가 끝난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주변에 청소년이나 교육 관련 건물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의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건물 장식들은 벚꽃길과 상당히 잘 어울렸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청소년 문화공간 놀래올래'와 같은 몇몇 건물들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을 텐데, 아무래도 외부인들이 함부로 움직이는 게 민폐인 것 같은 시기라 몸을 사렸던 게 조금 아쉽긴 하다. 또 뭔가 들어가 보고 싶은 카페나, 맛있어 보이는 길거리 음식들도 있었는데, 마스크를 벗고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게 금기시되는 시기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게 조금은 서글펐다.
2-2. 신산공원, 도심 한복판에 있는 최고의 공원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신산공원이다. 전농로가 젊은이들이 인생샷을 찍는 곳이라면, 신산공원은 아이들과 함께 피크닉을 온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많은 곳이다. 자전거, 킥보드, 미니 자동차, 유모차 등 아이들이 탈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동수단을 다 볼 수 있으며, 돗자리를 펴고 깔깔대는 여고생들과 설렁설렁 운동기구를 타고 있는 할아버지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커다란 공원이다.
가운데 커다란 광장이 있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오솔길들이 여기저기 뻗어있는 게 신산공원의 특징인데, 그래서 그런지 잘 찾아보면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프로필 사진을 비롯한 멋진 사진들은 거의 다 이곳에서 나왔다. 특히 건천인 산지천을 따라가다 보면 벚꽃나무와 유채꽃을 함께 볼 수 있는데, 그 장관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제주의 봄'을 만끽하는 기분이 든다.
2-3 차가 너무 많아 아쉬웠던 제주대학교
세 번째 방문지는 제주대학교이다. 사실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실망한 곳이기도 하다. 전농로와 신산공원이 너무 좋아서 기대하고 갔던 제주대학교는 뭐랄까, 그야말로 사람과 차로 바글바글 대는 핫플레이스였다. 꽉 막힌 도로 탓에 이미 제주대학교로 가는 길에 우린 다 지쳐버렸고, 겨우겨우 주차해서 나온 길은 기대만큼 멋있지 않았다.
벚꽃으로 만들어진 터널이라 그런지 길 자체는 전농로랑 비슷했다. 하지만 전농로는 횡단보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하기도 편했고,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 줌을 땡겨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던 것에 비해, 제주대학교는 워낙 차로 가득 차 있어서 길을 걷는 게 고작이었다. 또한 전농로는 소품샵이나 카페 등 시선을 끄는 매력적인 건물들도 있었는데, 제주대학교는 그런 건 없었다. 그래서 그럴까? 오히려 제주대학교는 걸어 다닐 때보다 차 안에서 즐기는 풍경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 구경을 좋아한다면 달라진다. 길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정말 다양한 반려견들도 있었다. 비록 나는 사람 구경에 크게 흥미가 없어 나에겐 별로였지만, 취향이란 다 다른 것이니 말이다.
2-4 이번에 찾은 최고의 사진 스팟!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의외로 이번 제주대학교가 준 가장 매력적인 선물은 바로 이곳을 알게 된 점이다. 이곳은 시내에서 제주대학교로 가는 길에 있는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앞길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고,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아서 조금 위험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주변에 잠깐 차를 세워두고 하늘과 한라산, 그리고 벚꽃을 같이 구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늘 깨달은 건, 나는 숲 속에 파묻힌 꽃길도 좋아하지만, 커다란 꽃나무와 탁 트인 하늘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특히 오늘처럼 맑고 새하얀 구름이 한라산에 걸쳐있는 날은 더더욱 그러하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잘 나온 프로필 사진은 신산공원 사진이었지만, 오늘 나들이의 대표 사진은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사진이다. 아쉬운 점은 이곳이 체력이 다 떨어진 마지막이 아니라 초반부에 왔다면 더 잘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지만, 일단 여기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다. 지금의 아쉬움은 내년 봄을 위해 살짝 양보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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