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거림은 점점 어두운 어딘가로
당신과 나를 데려가려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을 따라야 한다며
귓가에 재잘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어느새 다다른 그곳은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너와 나를 집어삼킵니다.
"왜곡의 심연" 설명글
정보 전달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대'혐오'의 시대
대혐오의 시대다. 발전하는 알고리즘과 커뮤니티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반복적으로 혐오에 노출되게 만들고, 심지어는 스스로 혐오를 재생산하도록 만든다. 주류정치는 이에 발맞춰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혐오를 기반으로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혐오'라는 용어가 부각되었을 때 "너무 극단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라고 소심하게 주장하던 친구들은 어느덧 남아있지 않다. 이미 우리에게 '혐오'는 너무나 익숙한 언어가 되었고, 사회를 분석하는 당연한 툴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혐오'라는 단어를 마주쳤을 때, 나는 획기적인 언어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역'갈등', 레드'컴플랙스' 등의 용어밖에 없었던 내게, '갈등'이나 '컴플랙스'라는 언어로는 담아내지 못했던 수직적 구조와 권력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혐오'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언어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수직적 구조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혐오'라는 언어를 뺏어가는 세력조차 생겼다. 그러다 보니 거시적 분석들은 드러내고자 했던 '혐오'란 언어는 점점 그 힘을 잃게 되었고, 어느새 '갈등'의 다른 동의어가 되어버린 기분이라 씁쓸하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 '혐오'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이 전시회는, '어떤' 혐오를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다양한 혐오들을 일반화하여 '혐오'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난민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고, 여성 혐오에 대한 작품이 아동 혐오에 대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처럼 혐오가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들을 마주치며, 관람객인 나는 '혐오'의 본질에 대해 고민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대한 구조에 대한 숨막힘과 지독하게 느린 변화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만든 혐오스러운 세상
1) <소문의 벽> : 능동적으로 혐오에 노출되기
이 전시회의 특이한 점은 너와 내가 수동적으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상을 '만든' 사람임을 명확히 밝힌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걸 넘어, 직접 움직여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바로 <소문의 벽>이다. 어두운 방에 구멍 뚫린 벽이 있는 이 전시는 그저 가만히 서 있거나 빠르게 지나간다면 관람객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 벽에 눈을 딱 붙여서 빛이 나오는 구멍 안을 들여봤다. 그리고 곧 그 안에 적혀있는 글을 보며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곧 다음 문구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벽에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또다시 불쾌함을 느꼈다.
구멍 안에 적혀있는 글들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들이었다. 그들이 악마라든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든지, 부도덕한 사람들이란 말들 따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엔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나와있지 않다. 그래도 무수히 많은 혐오의 역사에서 반복된 표현인지라, 오히려 '그들'은 누구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불쾌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나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적혀있을지 궁금해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혐오표현에 진저리 치면서도, 궁금해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다할 때가 있다. 그저 공격과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일까? 어째서 나는 이 <소문의 벽>을 그저 지나치지 않았던 것일까?
2) <비뚤어진 공감> : 혐오표현과 나
이런 고민은 작품 <비뚤어진 공감>에서 까지 이어졌다. 여러 혐오 발언들을 수집한 이 작품은, 사람이 그 글들 위로 올라가면 벽에 있는 그림자에 그 글들이 투사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혐오하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진부할 정도로 전형적인 표현들이라 역시 '그들'은 누구도 될 수 있는 점도 같았다. 그러나 <소문의 벽>이 혐오표현을 관음 하는 내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비뚤어진 공감>에서는 혐오표현을 다른 각도로 투사하는 내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그 내용들 더 진득하게 볼 수 있었고, 곱씹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전자가 유발하는 감정이 불쾌함과 호기심이라면, 후자가 유발하는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나열된 혐오표현을 보며 하나 깨달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만약 혐오표현에서 나타나는 위협이 실제라면, 이 표현들은 해방의 언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습게도 현대사회의 난민들을 조롱하는 '우리'는, 식민지배 시대의 피지배민족으로서 '우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표현 그 자체가 아니라 가상의 '우리'와 가상의 '그들'이 누구인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표현은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정의감과 연대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작품의 소개말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수자를 짓밟으면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나, 타민족과 타국의 혐오를 기반으로 애국과 애족을 부르짖는 이들은 '정의감과 연대감'을 갖고 행하는 일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일 테니 말이다.
물론 이는 내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내용이다. 나 또한 언제든 해방의 언어로 착각하는 혐오표현을 쏟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우리'가 누구인가와 '그들'의 위협이 진실인가이다. 그리고 '혐오'라는 언어가 드러냈던 게 수직적 구조와 권력이었기에 이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3. 왜곡된 위협과 그를 넘어설 방법
1) <LOST#13> : 위협이라는 감정의 진실
<비뚤어진 공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전시회는 굉장히 독특한 작품들이 많았다. 흔히 전시회라고 하면 단순한 미술작품이나 조각품을 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 <패닉 부스>는 거울과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달의 어두운 면>은 지독할 정도로 글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이런 독특한 작품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쿠와쿠보 료타의 <LOST#13>이다. 이 작품은 <비뚤어진 공감> 바로 다음 작품인데, <비뚤어진 공감>만큼이나 충격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LOST#13>은 우리가 느끼는 위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천천히 움직이는 작은 기차에 달린 조명이 암실 벽에 쏘는 그림자를 감상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물건들은 아주 평범한 생활용품임에 비해, 그림자는 상당히 크고 위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볼 것 같은 도형자는 아파트형 공장처럼 보이고, 주방에 흔하게 널려있을 체망은 마치 발전소처럼 느껴진다. 이쑤시개는 송전탑이 되고, 책받침은 대형 다리가 된다.
나는 이 작품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이걸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감탄부터, 암실이 주는 불안감과, 예상치 못한 생활용품을 발견했을 때의 신기함, 그리고 왜곡된 그림자가 주는 놀라움까지 많은 감정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무엇보다 그림자로 다가오는 이미지가 공포스러웠다. 이 작품은 어떤 그림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떤 생활용품은 무슨 그림자를 만들기를 의도했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그림자에서 아파트형 공장과 발전소를 본 건, 내가 아파트형 공장과 발전소에 대해 무의식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무의식적인 위협이 어쩌면 그저 도형자와 체망일 뿐인 건 아닐까?
2) <숙고의 방> : 희망을 품고 나아가기
다행히도 이 전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혐오표현을 단순히 싸움으로 인지하고 관음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혐오표현을 쏟아내면서도 정의감과 연대감을 갖고 해방의 언어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왜곡된 인지로 인해 별 거 아닌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시는 그 와중에도 세상이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는다.
놀랍게도 세상은 변했다. 유대인에게 쏟아냈던 혐오의 표현은 난민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이상 홀로코스트가 용납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독하게도 많은 혐오표현만큼은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에서 주목해야 하는 수직적 구조와 권력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글도 분명 많이 존재한다. 어쩌면 놀랄 정도로 뻔한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대혐오의 시대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다. 그렇기에 위협이 진실인지를 경계할 것, '우리'와 '그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것, 혐오표현을 쉽게 관음 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 변한다는 걸 알고 공부할 것이 과제로 남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혐오표현을 뱉어내는 너도 이 세상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세상을 만든 것은 너와 나다. 그러고 보면 이것 또한 뻔한 교훈이다. 그러나 아주 지난하고 어려운 교훈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겠지? 지독한 세상이로구나.
'Trip > 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 요시다 유니 ; Alchemy : 찬사를 불러일으키는 집요함 (2) | 2023.09.03 |
---|---|
[전시]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 세련된 반항, 행동에 관한 전시 (1) | 2022.10.04 |
[전시] 에릭 요한슨 사진전 : 초현실적이고도 자유로운 사진전 (0) | 2022.07.24 |
[전시] 괜찮아 (전이수 갤러리) (0) | 2022.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