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ST ART MAKES THE WORLD FEEL
A LITTLE BIT LESS TERRIFYING, IT MAKES
THINGS FEEL A LITTLE MORE INTERTWINED.
최고의 예술은 세상을 조금 더 두렵게,
서로를 조금 더 가깝게 만든다.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시 문구 중
관람 일자 : 22. 09. 09
정보 전달이 아닌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행동하라, 다만 백화점이니 정숙하게!
1-1. 낯선 이름의 힙한 전시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이번 전시가 의류 브랜드 'OBEY'의 팝업스토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온라인 티켓 구매페이지에는 작가 셰퍼드 페어리에 대해 "유명 의류 브랜드 'OBEY'의 창립자"라고 강조하고 있었고, 네이버의 메인 이미지에는 의류 브랜드 'OBEY'의 상징적인 아이콘 '오베이 스타페이스'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트릿 의류 브랜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오베이 스타페이스는 '요즘 잘 나가는 기괴한 풍의 그림?' 정도의 감상이어서 더더욱이나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오베이 스타페이스는 1989년 셰퍼드 페어리가 대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과 장난 삼아 만들었던 '오베이 자이언트'를 이용해 만든 셰퍼드 페어리의 심볼 중 하나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이미지를 따 만든 '오베이 자이언트' 스티커는 당시 스케이트 보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유행을 만든 일종의 밈이었다. 하지만 밈은 보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향유하는 집단이나 시대 속에서 의미가 생겨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 90년대 아메리카의 반항적인 문화도, 프로레슬링도, 스케이트보드도, 심지어 스티커 문화도 익숙지 않은 내겐 그저 기괴해 보이는 문장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전시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예상치 못하게 서울 일정 중 남는 시간이 생겼고, 마침 가는 곳이 송파이기에 들리는 소위 '잘 나가는 힙한 전시회'를 가보는 것도 좋겠지 정도 였달까? 그러나 막상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 내가 마주한 건 의류브랜드 'OBEY'의 팝업스토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의류브랜드 'OBEY'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압도적인 작품수와 화려한 공간감으로 가득 찬 거대한 전시장이었다.
나는 그제야 "위치는 롯데백화점, 가격은 19,000원, 예상 관람 시간은 1~2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와닿았다. 그저 힙하고 잘 나가는 전시회라서 비싼 돈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4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예상치 못한 공간 구성, 그리고 1시간 반이 넘어가는 다큐멘터리 영상과, 숨 막힐 정도로 교양을 따지는 안내문까지... 정말 초대형의 대대적인 전시회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류브랜드 'OBEY'가 셰퍼드 페어리의 작품세계에 극히 일부분만 상업화시킨 브랜드란 걸 깨닫고 아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얼른 기괴한 오베이 스타페이스뿐만 아니라 이 멋진 작품들을 옷에 프린팅하라고!!
오베이 | 무신사 스토어
OBEY(오베이)는 지금은 최고의 어반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Shepard Fairey의 그림과 비전으로 2001년도 스트리트 씬에 첫 발을 내디딘 브랜드입니다. 현재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스트리트 브랜
www.musinsa.com
어찌 되었든 나와 친구는 별생각 없이 들어간 전시회에서 거의 3시간이 다 되도록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다음 일정이 없었다면 그보다도 더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볼 것도 많고 규모도 상당히 큰 전시였다.
1-2. 다큐멘터리 <Obey Giant : The Art and Dissent of Shepard Fairey>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다큐멘터리 <Obey Giant : The Art and Dissent of Shepard Fairey>는 내가 이 전시에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데에 있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셰퍼드 페어리의 삶과 작품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1시간 반이라는, 그러니까 전시회에 한 켠에 틀어놓기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심지어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등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이니, 전시랑은 별도로 독립영화를 한 편 본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Obey Giant (2017) - IMDb
Obey Giant: Directed by James Moll. With Pedro Alonzo, Mr. Brainwash, Robbie Conal, Laura Dawn. The life and career of street artist, illustrator, graphic designer, activist, and founder of OBEY Clothing, Shepard Fairey.
www.imdb.com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는 그의 삶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반항적인 스트릿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펑크락과 스케이트 보이 문화에 깊이 심취해있었다. 본격적인 예술활동의 시작도 '오베이 자이언트'라는 약간은 장난 같은 스텐실 스티커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수예술에서 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나 미학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대신 그는 스텐실로 하는 그래피티를 즐겼고, 단순한 유머를 메시지로 삼았다.
예술가로서 성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작품에는 '오베이 자이언트'와 스트릿 예술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다. 색깔의 종류는 적지만 눈에 잘 띄는 격렬한 원색들을 이용하는 것, 명암에 대한 세밀한 묘사보다는 극명한 대비가 드러나도록 그리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전의 반항적인 유머는 사회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로 계승되었고, 여전히 그의 작품에는 유머러스한 코드들이 담겨있는 것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반항적'이라는 표현은 조금 고민이 된다. 셰퍼드는 오바마의 선거 포스터 <HOPE>를 그려 유명해졌다. 그의 정치적 성향도 마이너리티에 대한 지지와 환경운동으로 확실히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된다. 이런 정치적 성향은 분명 8-90년대 셰퍼드가 처음 예술가로서 활동했을 때는 충분히 반항적인 아이디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민주당이라는 거대 정당의 포함될 정도로 충분히 주류적이고 '힙'한 성향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생각보다도 더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스트릿 예술은 이제 폐허에 그려지는 낙서가 아니라 다른 낙서들이 더해지지 못하도록 관리되는 작품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한국사람의 시선에서는, 한때 반항적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한국사회에서 주류가 되어버린 86세대가 비쳐 보이는 느낌이랄까?
각설하고, 그의 다큐멘터리가 이 전시에서 중요한 역할은 한 이유는 단순히 그의 삶이 매력적이거나, 1시간 반짜리 긴 러닝타임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그의 작품은 강렬한 이미지와 색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고 '힙'하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이미지와 공간의 강렬함에 비해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편이다. 애초에 400점이 넘는 작품이기에, 작품 하나하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든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캡션은 제목 말고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제목도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작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거대한 건물 자체를 꾸미던 스트릿 예술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공간 자체가 독특하게 구성된 경우가 많다. 보통의 전시관에서는 '작품 밑에 캡션'이런 느낌이었는데, 여기선 벽의 한 면이 가득 차 있는 작품들도 있고, 작품들도 두줄 배치, 세줄 배치, 심지어는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캡션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뜬금없는 곳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작품의 제목 찾는 것조차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서 음미하기보다는, 공간 자체를 통으로 온전히 느끼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가에 대한 이해가 다른 전시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렬한 빨간색', '힙한', '전쟁반대', '환경운동', '롹스타' 이 정도로 다가오던 작품들이, '미국', '반항아', '스트릿 예술', '국가폭력에 피해자', '이라크 전쟁의 반대자', '거대 석유산업 비판'이라는 구체적인 문구들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1-3. 그래서 롯데뮤지엄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래서일까? 잘 몰랐을 때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롯데뮤지엄이라는 공간이 뭔가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졌다. 롯데타워는 건설과정에서부터 환경파괴와 노동자 안전문제, 그 외에도 각종 잡음으로 시끄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인종차별, 환경, 평화와 예술의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전시가 롯데타워에서 하는 게 맞는 걸까? 다만 이 의문은 나만 갖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전시 개막 전 간담회에서 셰퍼드 페어리에게 직접 질문한 기자도 있었다. 아래 기사에 따르면 셰퍼드는 "생태학적으로 이 건물이 내 철학과 맞지 않더라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과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다. 만약 내 철학과 동일시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에서도 전시를 열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현장리뷰]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EYES OPEN, MINDS OPEN)》展, 순응‧복종을 거부하라는 ‘Obey!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강렬한 메시지를 품은 이미지, 상징적 표현을 통해 “행동하라!”라고 소리 내는 아티스트 셰퍼드 페어리가 한국을 찾아왔다. 도시 예술을 기반으로, 광고, 선전
www.sctoday.co.kr
공간의 아이러니함은 단순히 건물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전시장의 분위기 자체가 자유로움과 반항심을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딱딱했다. 작품 옆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낙서하는 것 까지야 당연히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의 손잡고 관람하라는 문구나, 입장 시 가방은 앞으로 매달라는 표현, 정숙을 요청하는 글들은 분명 잘못된 건 아니지만... 굳이? 지금 하고 있는 전시랑 너무 달라서 좀 웃기달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셰퍼드 페어리의 30년간의 예술세계를 공간에 담아냈다는 <더 파크>도 너무 깔끔했다. 스케이트 보이가 스텐실 작업하는 공간이 이렇게 깨끗하면 안 되지 않을까? 편견인가 싶긴 하지만... 애들도 좀 뛰어놀 수 있고, 물건도 만져볼 수 있다면 좀 더 행동하는 반항아라는 이미지에 맞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내가 오베이만큼이나 행동하는 반항아였다면, 분명 여기에 오베이 자이언트의 스티커를 가져와서 붙였을 게 틀림없을 정도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반듯했다.
2. 작품 소개
이번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보다는 공간이 주는 임팩트가 더 크다고 위에 서술했지만, 그래도 인상 깊이 남은 작품들도 많았다. 이 작품들을 주제별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1. 인종차별과 젠더문제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띈 작품들은 당당한 표정의 유색인종 여성을 그린 작품들이다. 셰퍼드는 예술을 통해 인종차별과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아래 사진에 있는 <BIAS BY NUMBERS>와 <ARAB WOMAN>이다. 두 작품 모두 정 가운데 여성이 위치해있다. <BIAS BY NUMBERS(숫자에 의한 편견)>는 신문기사의 내용이 상하단 모서리에 적혀있고, <ARAB WOMAN(아랍 여성)>은 가운데에 셰퍼드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오베이 스타페이스가 있지만, 모두 배경으로 있을 뿐 주인공은 여성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흑인이자 아랍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고, 반대로 굴종적일 정도로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다. 조금은 위를 바라보는 당당한 표정, 이건 백인 엘리트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표정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혹은 '아랍인'은 편견의 대상이자 일종의 '적'으로 인식되는 이들이다. 셰퍼드는 이 두 작품을 통해서 집단화된 편견의 대상인 개인이 평범한 인간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더욱 주목할 점은 그림의 주인공들이 흑인 '여성'과 아랍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편견 속에서 흑인과 아랍인은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흑인 남성'과 '무장한 아랍인 남성'이다. 즉, 여성은 편견 속에서조차 종종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여성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보통 남성들에 의한 선량한 피해자, 혹은 무지한 동조자 정도로만 그려진다. 그렇기에 '흑인'과 '아랍인'의 편견을 꼬집는 그린 그림에서 당당한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인종차별과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그의 태도는 2017년 WE THE PEOPLE 프로젝트에서도 잘 드러난다. 2017년은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해로 많은 사람들이 혐오에 노출되던 시기이다. 이에 셰퍼드는 WE THE PEOPLE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로서 이 혐오를 비판한다. 그는 멕시코계 텍사스 여성인 마리벨 발데즈 곤잘레스의 초상화를 그려 <DEFEND DIGNITY(존엄성 지키기)>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트럼프 취임식 당시 미국의 혐오에 맞서는 상징적인 그림으로서 활용된다.
We The People - Amplifier
We The People is a nonpartisan campaign dedicated to igniting a national dialogue about American identity and values through public art and story sharing. Since its launch in 2017…
amplifier.org
2-2. 평화와 국가폭력
셰퍼드는 스트릿 예술가 출신이다. 스트릿 예술은 일정 부분 범죄의 영역에 친화적인 분야다. 그렇기에 국가기관과의 다툼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그는 공공시설에 낙서한 혐의로 체포된 적도 많다. 그리고 경찰에게 체포되었을 때 "널 때려도 난 처벌받지 않아"라는 말을 들으며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고, 1형 당뇨 환자임에도 수감 중 인슐린 투여를 허락받지 못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경험도 있다. 게다가 미국은 걸프전-아프가니스탄전쟁-이라크전쟁 등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한 국가다. 최고의 군사대국이자 강대국으로 세계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기도하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예술가에게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인종차별과 젠더문제는 당장의 미국에서 매우 치열한 정치적 싸움의 현장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정치현장에서 활용되기까지 했으니 그의 그림은 정제되고 선언적인 느낌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평화와 국가폭력을 다루는 그림들은 셰퍼드 본인이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주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위트있고 풍자적이며, 아주 노골적으로 그려내었다. 대표적인 그림이 아래의 <WAR BY NUMBERS>와 <MY FLORIST IS A DICK>이다.
<WAR BY NUMBERS>는 1964년 린든 B. 존슨의 대선광고 <Daisy Girl>에 대한 오마주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인해 쿠바에는 반미·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이에 미국과의 핵경쟁에서 밀리고 있던 소련은 빠르게 쿠바와 동맹관계를 맺으며 1962년에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이를 미국이 알아내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다행히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소련은 쿠바의 모든 미사일을 철수했으며, 미국 또한 소련 근처인 터키와 중동국가에 설치된 미사일기지를 제거하였고,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1964년 대통령 선거가 일어난다. 그런데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베리 골드워터는 핵무기 사용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강경파였다. 이에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린든 B. 존슨은 핵전쟁에 반대하는 TV광고를 내는데, 이 광고가 <Daisy Girl>이다. 광고 <Daisy Girl>은 귀여운 4~5세의 소녀가 데이지 꽃잎을 하나씩 떼며 '원, 투, 쓰리...'라며 숫자를 세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소녀가 9까지 세었을 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핵무기가 발사된다. 이 광고는 당시 강경파였떤 베리 골드워터 후보를 몰락시키기 충분했고,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셰퍼드는 <WAR BY NUMBERS>에서 이 작품을 오마주한다. 데이지 꽃은 수류탄에 달려있는 장미꽃으로 바뀌었지만,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전투기 등 장면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10초간의 카운트다운조차 필요 없어진 21세기의 전쟁에 어울리도록 안전핀을 뽑으면 끝나는 수류탄으로 바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셰퍼드는 이 그림을 통해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전쟁의 위험과, 미래세대를 위한 평화의 중요성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강경파를 선택하지 않았던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한다.
그 옆의 작품 <MY FLORIST IS A DICK(내 꽃집 주인은 경찰(얼간이)>는 제목부터가 풍자적인 작품이다. DICK은 얼간이라는 뜻의 비속어이면서 동시에 경찰을 뜻하는 속어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경찰봉에 달려있는 붉은 꽃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던 히피족은 그들의 시위를 제압하려는 군사 경찰의 총구에 비폭력을 상징하는 꽃을 달았다. 이는 '플라워 파워'라고 불리며 이후 반전운동의 상징이자 히피문화의 상징이 되는데, 셰퍼드도 이를 의식하고 경찰봉에 붉은 꽃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플라워 파워'는 무기에 꽃을 다는 것으로 무기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꽃이 달린 무기를 든 군사 경찰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셰퍼드는 작품명에 Florist라는 단어를 넣고, 군사 경찰의 얼굴을 해골로 만듦으로써 기존의 관념을 흔든다.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경찰이 들고 있는 붉은 꽃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꽃은 꽃이 아니라, 플로리스트인 본인이 직접단 기만의 상징인 것처럼 보인다.
과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셰퍼드는 군사 경찰을 철저하게 악인으로 묘사한다. 플라워 파워로 대변되는 히피족의 선량한 평화운동이 종결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미국의 군사 경찰들은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심지어 군사 경찰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적'으로 규정되는 외국인들이 아니라 셰퍼드 본인을 포함한 미국의 시민들이었다. 이에 셰퍼드는 플라워 파워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듯한 그림을 그려넣음으로서 이를 강도 높게 풍자한다.
2-3. 기후위기의 환경운동
다큐멘터리 <Obey Giant : The Art and Dissent of Shepard Fairey>는 2015년에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 설치한 대형 설치예술작품을 설치하며 끝이 난다. COP21은 2020년으로 끝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기후변화협정을 만들기 위해 195개국이 프랑스 파리에 모인 21번째 당사국총회이다. 이곳에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1.5℃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전 지구적 장기목표 하에 모든 국가가 2020년부터 기후행동에 참여하며, 5년 주기 이행점검을 통해 점차 노력을 강화하자는 파리협정이 통과된다.
셰퍼드는 이 COP21이 열리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 대형 설치미술을 의뢰받는다. 그래서 그는 에펠탑 밑에 거대한 구형의 작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당시 설치했던 구형 디자인을 수정하여 포스터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데, 그게 바로 <A DELICATE BALANCE>이다.
PARIS // COP21: SHEPARD REVEALS EARTH CRISIS GLOBE, LOCATED IN THE CENTER OF THE EIFFEL TOWER - Obey Giant
Shepard unveils his latest work “Earth Crisis:” a giant sphere suspended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floor of the Eiffel...
obeygiant.com
환경운동에 관한 그의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인지, <A DELICATE BALANCE>를 자세히 보면 상단에는 비슷한 색으로 변형되어 있는 <PAINT IT BLACK>이, 하단에는 <EARTH CRISIS>가 그러져 있다. 그 외에도 양 옆에는 <GREEN ENERGY>와 <GLOBAL WARNING>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 위의 링크되어 있는 Obeygiant.com에 워낙 잘 나와있지만, 그중 매력적인 <PAINT IT BLACK>과 <GLOBAL WARNING>에 대해 간단하게 적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PAINT IT BLACK>은 광택제를 뜻하는 POLISH를 정책을 뜻하는 POLICY로 바꾸어 석유산업을 옹호하는 정책들에 대해 풍자하는 작품이다. 제목은 1966년에 발매된 롤링 스톤의 노래 Paint It, Black에서 따왔는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절망과 어둠으로 표현한 이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석유산업과 이를 지지하는 정책이 만드는 기후위기의 절망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다음 작품인 <GLOBAL WARNING>은 신문으로 햇빛을 가린 채 행복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신문에는 'are we betraying the planet?(우리가 지구를 배신하는 건가요?)'라는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사가 적혀있다. 셰퍼드는 이를 통해 기후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만든다.
3. 예술과 정치 : 행동하라!
예술과 정치 간의 관계는 언제나 뜨거운 주제다. 예술은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되어 왔고, 심지어는 특정 정치적 목적하에 규제되기까지도 했다.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는 감정은 자연스레 행동을 유발하니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락예술에 불어닥친 PC(정치적 올바름)논쟁과 프로파간다의 예술성 논쟁들을 보다 보면 어떤 단순하고 쉬운 잣대를 가지고 예술과 정치 간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셰퍼드의 작품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심지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기 위한 그림도 그렸었고, 반대로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네거티브적 의미를 가진 작품들도 그렸다. 게다가 그는 스텐실이나 포스터라는 양식, 명함이 없는 강한 표정의 작품들은 마치 전체주의 국가의 프로파간다 작품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예술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단순히 그게 선전하는, 혹은 선동하는 정치적 방향성이 '옳'기 때문인 걸까? 나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프로파간다와 닮은 양식으로 가장 자유롭고 반전체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 행동지침과 방식을 예술이라는 형태를 통해 주는 것이 아닌 것, 단순한 상대에 대한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적절한 위트와 풍자를 뒤섞은 것, 뭐 이런 것들이 섞여서 예술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스갯소리지만 누구보다도 반항적으로 행동하라는 작품을, 그 어느 전시회보다도 세련되게 규제하며 전시하는 롯데뮤지엄 또한 예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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